Ⅹ.종교관련 시사 등/14.목사로 변신한 고문기술자 이근안

목사로 변신한 고문기술자 이근안

블핵홀 2011. 12. 30. 16:07

 

헤럴드경제

목사로 변신한 고문기술자 이근안...“심문은 일종의 예술”

2011-12-30 10:48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별세 소식으로 그를 수차례 고문한 이근안 목사(73)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지난 2008년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26년전 김 고문을 고문할 때만 하더라도 그는 ‘김전무’, ‘박중령’으로 불리며 재야 운동권 사이에서 악명이 떨쳤다. 당시 ‘반달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그는 ‘관절뽑기’, ‘볼펜심문’ 등 각종 고문에 통달해 다른 기관에 ‘고문출장’을 다니기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고문은 지난 1983년 9월 전두환 정권 최초의 저항단체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했고, 이를 이유로 85년 구속되면서 이근안을 만나게 된다. 1985년 9월 4일 비내리는 새벽 남영동 대공분실 515호로 끌려간 이근안 경감에게 16일동안 10여차례에 걸쳐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았다.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이근안 경감은 10년10개월간의 도피생활을 했다. 그의 도피생활을 모티브로한 ‘생강’이라는 소설이 쓰여지기도 해다.

도피생활을 마무리하고 자수하면서 얼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는 7년간 복역을 거쳐 2006년에 출소했다. 그러던 중 김 고문은 2004년 이근안씨를 직접 면회하며 “용서한다. 건강하시길 빈다”라며 역사적 용서를 하기도 했다.

출소 뒤 이근안씨는 2008년 10월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임직 예배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당시 그는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며 “교정선교 활동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했다.

이후 그의 목회 활동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출소 뒤 수십차례에 걸친 간증에서 “빨갱이를 잡았을 뿐인데, 정권이 바뀌자 죄인이 되어 있었다”고 주장한 말들이 알려지면서 자신의 고문 활동에 대한 사죄의 진정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특히 최근 모 언론사와 인터뷰에서 ‘심문의 일종의 예술이며, 당시 시대상황에선 애국’으로 표현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김 고문에 대한 진정한 사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민주화의 큰별이 졌다”…슬픔에 젖은 故김근태 고문 빈소

2011-12-30 13:03

 

민주화의 대부로 통하는 故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타계한 30일 오전. 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공식 조문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의 타계 소식을 접한 조문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김 상임고문은 이날 오전 5시31분 6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수년째 파킨슨병을 앓아온 데 이어 지난달 29일 뇌정맥혈전증으로 서울대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은 김 상임고문은 2차 합병증이 겹치면서 패혈증으로 한 달만에 숨을 거뒀다.

유족들은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김 상임고문의 마지막을 지킨 후 오전 7시께 장례식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족 및 관계자들은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빈소가 마련되기 전부터 조문객들이 하나둘 방문하자 김 상임고문측 관계자들은 그의 영정사진을 들고 장례식장 한쪽 구석에 섰다. 임시로나마 조문객들이 김 상임고문의 마지막 가는 길을 기릴 수 있도록 한 것. 한 조문객은 사진을 보자마자 “아이고 아이고” 통곡하며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오열했다. 

 

 

SBS뉴스

'노숙자 구제사업한다' 목사가 9억 가로채

서울남부지검 형사4부(이완규 부장검사)는 30일 노숙자 구제사업에 투자하면 돈을 불려주겠다고 속여 금품을 가로챈 혐의(사기)로 목사 이 모(56)씨를 구속기소했다고 30일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이 씨는 2009년 5월부터 지난 3월까지 자신이 운영하는 복지재단을 찾아온 93명으로부터 333차례에 걸쳐 3억7천여만 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또 회원 가입비 명목으로 작년 5월부터 지난 4월까지 74명으로부터 460차례에 걸쳐 5억4천여만원을 받는 등 총 9억1천만 원 상당을 챙겼다.

조사결과 이 씨는 피해자들에게 매주 3만5천 원씩 24주만 돈을 내면 최대 440만 원까지 받을 수 있다고 속였으며, 받은 돈은 대부분 개인적 용도로 유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1998년 목사가 된 이 씨는 서울역 부근에서 길거리 교회와 복지재단을 운영하며 노숙자들을 상대로 설교 등 활동을 벌여왔다.

검찰은 피해자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이씨의 여죄를 추궁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이근안은 어떻게 버젓이 목사가 되었나
[이태경 칼럼] "고문이 아니라 신문? 하나의 예술"이라고?
입력 : 2011-12-31  15:47:33   노출 : 2012.01.01  01:00:07
김근태 상임고문의 별세소식을 들은 후 슬픔과 낭패감, 분노와 불가해함이 뒤섞인 정체불명의 감정이 몰려왔다. 그 감정은 대략 공의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의인(義人)이 이땅에서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한 채 절명한 반면, 악인들은 여전히 건재하고 점점 힘이 세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에서 연유하고 있었다. 또한 그 감정은 암흑의 시대를 만들었던 주범들과 하수인들에 대한 심판과 청산의 부재, 여전히 그들의 후예들이 사회 각 부면을 주름잡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감, 좋은 세상이 도대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회의 등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김 고문의 죽음에 원인(遠因 )을 제공한 이근안 목사가 지금 이 순간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 전화기도 꺼놨다는 이 목사는 김 고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있을까? 김 고문의 영혼에 사죄와 참회의 기도를 하고 있을까?
 
수사대상자들을 불법 감금·고문한 혐의로 수감됐던 이근안씨. 지난 2006년 징역 7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해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작년 <일요서울>과 한 인터뷰에서 이근안 목사는 자신의 고문행위를 애국행위로, 자신을 "신문(訊問) 기술자"로 지칭하며 "신문은 하나의 예술"이라는 궤변을 늘어놓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이 목사에게 개전의 정이 없다는 사실은 이 목사가 목회자가 된 후 밝힌 "간첩죄로 잡아들인 애들이 후일 민주화 인사로 보상받는 걸 보고 울화가 치밀어 감옥에서, 믿을 수 있는 나라, 배신 없는 나라를 찾다 보니 하늘 나라를 찾게 되었다" 는 발언 속에서 명백히 확인된다.

이근안 목사는 고문기술자로 활약하면서 저지른 수다한 고문행위에 대한 인정에도 지극히 인색했다. 그는 김 고문 외 2명에 대한 고문-그조차 이 목사는 강제신문이라고 주장한다-사실만 증인이 등장한 후 마지못해 인정했을 뿐이다. 이쯤되면 인간이라는 종(種)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밀려올 지경이다.

그런 이 목사에게 사실인정이나 사죄나 참회를 기대하는 건 부질없다. 이 목사의 사례는 고문 등의 반인권행위자들에 대한 엄격한 처벌과 단죄가 필요함을 극명하게 보여준다하겠다. 공소시효가 배제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갖가지 미명 하에 인간의 육신과 영혼을 파괴하도록 교사하고 이를 실행한 자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추적해 처단해야 한다. 그래야 그런 일들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낮아진다. 추상같은 사법적 처벌이 있은 연후에야 가해자들의 자백과 참회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며, 오히려 법의 심판이 가해자들의 집단적 고해성사를 유도할 것이다.

그런데 이근안 목사는 어떻게 목사가 될 수 있었을까? 당연히 그에게 목사안수를 해 준 개신교 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근안 목사는 한국 개신교가 너무나 깊은 병에 빠졌다는 증거다. 설사 이근안이 목사되기를 원했다해도 개신교 내의 모든 교단들은 이를 수락하지 말았어야 했다. 교회는 이근안에게 이렇게 권면해야 옳았다. "당신의 손에 영혼과 육신이 망가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가능한 한 직접 찾아뵙고 사죄하고, 남은 여생은 소외된 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라. 그게 진정한 참회고 그래야 당신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것이다"라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근안은 버젓이 목사가 됐다. 이근안 목사는 최근까지 자신의 행위를 애국으로 강변하며, 자신이 파괴한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가정을 욕보이고 있다. 값싼 용서와 거짓 참회를 남발하는, 결정적으로 정의(正義) 관념과 윤리적 미감, 역사의식이 부재한 한국개신교는 자신이 병들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사죄와 참회가 요구되는 건 이근안 뿐이 아니다. 그에게 목사 안수를 준 교단과 그 교단을 품고 있는 개신교계 전체가 돌이켜 회개해야 한다. 정의와 윤리가 없는 개신교의 미래는 암울할 따름이다.

 

 

 경제가 보인다! 서울경제

 

 이근안, 소속 교단서 목사 면직 결정


정승양기자 schung@sed.co.kr
입력시간 : 2012.01.19 19:41:19
수정시간 : 2012.01.19 19:41:19
‘고문기술자’로 불리다 목사가 된 뒤 자질논란을 일으켰던 이근안 씨가 목사직에서 면직됐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개혁총회는 지난 14일 긴급 징계위원회를 열고 이근안 씨에 대해 목사직 면직 판결을 내렸다고 19일 밝혔다. 합동개혁총회 교무처장 이도엽 목사는 “교단은 이근안 씨가 목사로서 품위와 교단의 위상을 떨어뜨렸으며 겸손하게 선교하겠다는 약속도 어겼다고 판단해 이 같은 징계를 내렸다“며 “한 번 면직이 되면 복직은 불가능하며 이근안 씨도 아직 별다른 이의제기를 하지 않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근안씨는 2008년 10월 목사 안수를 받은 뒤 교정 선교와 신앙 간증 등의 활동을 해왔지만 종종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닌 애국자”라고 표현하며 고문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보여 논란을 빚어 왔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이근안에 고문당한 여기자의 편지 “청소부가 돼서 죄를 씻고 또 씻어라”
  • 2012.01.19 19:46

[쿠키 사회] 과거 이근안에게 물고문을 당한 적이 있다고 밝힌 전직 여기자가 인터넷에 관련 글을 올렸다. 여기서 그는 이씨에게 “차라리 청소부가 돼서 죄를 씻고 또 씻어라”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페미니스트 웹진 ‘이프’의 공동대표 유숙열씨는 지난 17일 ‘내게 팬티를 사준 남자, 이근안에게’라는 제목의 글을 이프 홈페이지에 올렸다.

이 글에 따르면 유씨는 합동통신 기자로 일하던 1980년 7월 17일 지명수배로 쫓기던 당시 한국기자협회 김태홍 회장에 피신처를 소개해 줬다는 이유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유씨는 “그들은 기를 죽이려는 듯 처음에는 험악한 말로 욕설을 퍼부으며 협박을 했다가, 정중하게 ‘기자’ 대접을 했다가 또다시 뒷덜미를 잡고 물이 담긴 욕조에 머리를 쑤셔박았다”고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한참 고문을 받던 그는 30, 40대의 건장한 남자들 여러 명이 몽둥이를 들고 모여있는 방으로 옮겨졌고 그곳에 이씨가 있었다.

그는 “누군가 내게 칠성판 위로 올라가라는 신호를 보냈고... 다시 누군가 돌아누우라고 했고 돌아누운 내 몸 위에 버클이 주르룩 채워지며 육중한 몸집의 남자가 올라탔다”고 설명했다. 유씨는 올라탄 남자가 바로 이씨였다고 밝혔다.



유씨는 “물고문 한번 당한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온몸이 물에 젖어 한여름인데도 사시나무 떨듯이 몸이 떨려왔고 담요를 여러 장 뒤집어써도 추위가 가시질 않았다”며 당시의 공포와 충격을 전했다.

유씨는 글의 제목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씨가 자신에게 속옷을 사다 준 사연도 이야기했다.

고문 쇼크 끝에 링거를 꽃고 침대에 누워 있던 유씨는 생리가 갑자기 터지는 난감한 일이 발생했다.

유씨는 어쩔 수 없이 이씨를 불러 “아저씨, 저 생리가 터졌는데요”라고 말했고, 결국 이씨가 생리대와 팬티를 사다줬다.

이때 유씨는 이씨가 ‘내가 생전 여자 속옷을 사봤어야지. 가게 가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아냐’며 여자 팬티 사온 얘기를 동료 앞에서 호들갑스럽게 떠들었다고 회상했다.

유씨는 “순진한 마음에 사람을 고문하는 직업을 가진 당신이 진심으로 안쓰럽게 느껴졌을 수도 있고 또 곤란한 일을 해결해준 당신에게 인간미를 느꼈는지 이씨에게 ‘직업을 바꾸라’고 말했다”고 했다.

유씨는 “남들이 당신을 목사직에서 끌어내리기 전에 스스로 그 자리에서 내려오십시오. 무언가 일을 해야 한다면 차라리 청소부가 되어서 묵묵하게 자신의 죄를 씻고 또 씻으십시오. 아니면 당신이 일했던 남영동 대공분실 경비원으로 역사의 산 증인이 되어 사죄하십시오”라며 글을 맺었다.

한편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개혁총회는 지난 14일 긴급 징계위원회를 열고 이근안씨에 대해 목사직 면직 판결을 내렸다. 국민일보 쿠키뉴스팀

 

 

고문·학살도 용서하는 하나님 위 ‘상 하나님’ [2012.01.30 제895호]
[김동춘의 폭력의 세기 vs 정의의 미래] “고문이 애국”이라는 이근안의 자기정당화 논리
죄 많이 지은 자들을 구원해 준 반공 이데올로기
       
2011년 12월30일 새벽,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이 세상을 하직했다. 그는 1970∼80년대 군사독재하에서 온몸을 던져 저항했던 한국 민주화운동의 아이콘이다.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사건으로 구속돼 온갖 종류의 고문을 당하고, 그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파킨슨씨병을 앓아오다가 64살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승의 끈을 놓아버린 것이다. 김 상임고문은 서울 남영동 515호실에서 폭력혁명주의자, 공산주의자임을 자백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결국 그는 공안 당국이 불러주는 소설 같은 혐의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 1999년 10월 자수하는 고문기술자 이근안. 그는 10년을 숨어 있다가 공소시효가 완료됐을 때 자수했다. <한겨레> 자료
학살과 고문을 정당화하는 나라

1986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그를 고문했던 이근안은 2008년 5월 충남 태안 지역 ‘제1기 아버지학교’에 특별강사로 나서, 자신은 빨갱이만 잡았는데 정권이 바뀌니 역적이 돼 있었다며 억울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심문(고문)은 예술이다”라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던 그는,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일을 할 것이다. 당시 독재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며 자신의 행위를 미화했다.

한국 교회는 이런 이근안을 목사로 만들어주었다. 설사 극악한 고문범죄를 자행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목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고문한 사실을 부인하고, 공식적으로 과거 일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한 적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그것이 애국행동이었다고 큰소리를 치는 사람을 목사 예우까지 해주었고, 태안 군민들은 그를 강사로 초청했다. 부산 시민들은 김근태 상임고문을 고문할 때 지휘 라인에 있던 안기부 대공수사단장 정형근을 세 번이나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켰다. 그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을 지내는 등 건재하고 있다.

이근안의 말과 행동은 영화 <밀양>(원작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에 잘 그려졌다. 주인공 신애는 유괴범에게 아들을 잃은 뒤 그 죄책감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길로 들어서는데, 신앙을 통해 치유를 경험한 신애는 자신의 아들을 유괴해 살해한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교도소로 찾아간다. 그러나 자신이 유괴해 살해한 아이의 엄마가 왔음에도 그 살인범은 뉘우치는 기색이라곤 눈곱만치 보이지 않은 채 자신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평안하게 살고 있다고 말한다. 이 살인범은 바로 5·18 광주 학살을 반성하지 않는 신군부의 모습 그 자체다. 그들은 1980년 광주에서 대량학살극을 벌인 것도 성에 차지 않아 집권 뒤 수많은 고문을 통한 간첩 조작 사건을 지휘했다. 전직 군 장성, 전직 장관, 전직 의원, 전직 국가기관의 ‘큰 어른’으로 대접받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오늘날 대형 교회의 원로 장로나 집사의 예우를 받고 있다. 그들의 ‘하나님’은 어떤 죄과를 어떻게 용서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은 과거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자신의 책임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근안처럼 “그때는 그게 애국이었다”라고만 암묵적으로 말하지 않고 “지금 봐도 그것은 애국이었다”라고 말한다. 국제사회에서 유대인 대량학살(Holocaust)을 부인하는 것은 범죄로 간주된다. 그런데 학살과 고문을 단지 부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이 나라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결국 이들에게는 그들을 받아준 하나님 외에도 칭찬과 격려까지 해주는 ‘더 높은 하나님(반공이데올로기)’이 있다는 얘기다.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준 하나님은 그저 정신적 위로만을 주지만,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해주고 미화해주는 하나님은 정치적·신체적·제도적·물질적·사회적 지위와 안식까지 보장해준다. 이 세속정치를 관장하는 하나님은 김근태를 고문하도록 허용해주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인들의 생사여탈권을 쥐어왔다.



‘젖먹이도 징그러워 한 빨갱이’

한국전쟁을 전후해 이 하나님은 ‘의심되는’ 민간인을 마구잡이로 죽이도록 해주었다. 1949년 12월24일, 경북 문경의 첩첩산중에 있는 석달마을 주민 86명이 국군에게 무참히 학살당했다. 군인들은 민가에 불을 놓고서 뛰쳐나오는 주민을 닥치는 대로 사살했고, 마을 뒤 산모퉁이에 숨어 있던 청년들과 하굣길의 어린이들까지 사살했다. 희생자의 70%는 20살 이하의 청소년이거나 노인들이었다. 10살 이하의 어린이도 22명(25%)이나 되었다. 현장 생존자인 채의진에 의하면 “이놈들, 빨갱이 밥 해주고 돼지 잡아서 주었지? 우리는 국군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끔찍한 학살사건을 조사하던 당시 미군 쪽은 “군인들이 마을 주민들에게 추궁했던 공산주의자들과의 내통 혐의는 군인들이 뒤집어씌운 누명이었고 확인사살까지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 학살의 진상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시 한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공비의 최후적 만행으로서 국군을 가장하고 부락에 침입하여 살인·방화 등을 감행한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의 호적에는 이들이 공비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거꾸로 적혀 있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석달마을 사람들이 군에 학살당한 사실을 밝혔는데, 진실화해위원회가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현재까지 공비에 의해 죽은 사람으로 공식화되고 국군의 범죄는 확인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공비 토벌 작전에 투입된 군인이나 경찰은 좌익이다 싶으면 재판도 없이 ‘즉결 처분’(학살)했다고 한다. 한 군인은 부락 내부 주민들 간의 사감으로 사람들이 ‘저놈 빨갱이’라고 지목하면 곧바로 즉결 처분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기억한다. “당시는 무법 상황이라서 빨갱이로 지목되면 중대장·소대장 선에서 즉결 처분해도 문제되지 않았고, 군인들도 중대장·소대장의 명령으로 즉결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토벌 작전에 지장이 있고 대상이 빨갱이라서 나중에 즉결 처분했다고 보고하면 문제되지 않았기에, 그것은 연대본부까지 보고할 사안이 아니었고, 현장에서 처분한 다음 서면 보고도 안 하고 구두 보고 정도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한국전쟁 때 경북 청도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 출신의 호림부대 등은 빨치산과 내통한 혐의가 있는 청년들을 잡으러 갔다가 이들이 보이지 않으면 부모 등 가족 일부를 대신 잡아서 죽이기도 했고, 집을 불태운 뒤 남은 가재도구를 빼앗기도 하고, 가족을 두들겨 패기도 했다. 이 극악무도한 학살과 약탈이 모두 ‘빨갱이 소탕’의 이름하에 정당화됐고, 그 일에 가담한 사람들이 지금까지 한국에서 ‘애국자’로 돼 있다.

박완서가 말한 것처럼 한국전쟁 시기는 “빨갱이라면 젖먹이 어린것까지도 덮어놓고 징그러워하고 꺼리던 때”였다. 그래서 벌레처럼 취급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 식구의 사고와 행동은 오로지 빨갱이냐 아니냐의 문제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다”(박완서, ‘엄마의 말뚝2’). 빨갱이로 지목되는 것은 사실상의 사형선고, 즉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것을 의미했고, 타인을 그렇게 지목하는 사람이나 집단 뒤에는 ‘상(上) 하나님’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상 하나님’은 빨갱이 잡는 일에 나선 이력이 있다고 주장하면 학살범·고문범·폭력범 등 반인륜적 범죄는 물론, 재산탈취범·학원비리범·사기범·조세포탈범·강간범까지 애국자라고 칭찬해주고 온갖 지위와 권력과 부를 안겨다준다.

» 2002년 12월24일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에 한국전쟁 때 군경에게 학살된 마을 어린이를 기리는 추모비 제막식이 열렸다. 당시 사건의 생존자인 채의진(오른쪽 아래)씨가 비문을 가리키고 있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범국민위원회 제공

‘상 하나님’의 대행자, 법원

속세의 심판자, 법원이 ‘상 하나님’의 대행자다. 김근태의 재판을 담당한 서성 판사는 제1회 공판기일까지 단독결정으로 가족면회를 금지했다. 말로는 김근태가 경찰에서 묵비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고문 증거를 인멸할 시간을 벌려는 것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다음에 그는 제1회 공판기일부터 방청권을 발행해 가족과 주변 민주화 인사들의 방청을 방해했다. 그는 김근태 진술의 진위를 판단하는 가장 핵심적 증거인 고문 사실을 고의적으로 회피했고, 김근태가 적은 탄원서를 변호사들이 열람하지 못하게 따돌리기까지 했다. 서성 판사의 원심법원은 공소 제기 절차가 법령을 위반했으므로 공소 기각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변호인들의 주장을 그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배척함으로써, 결국 김근태가 주장했듯이 그 재판은 고문경찰과 그들에게 명령을 내린 자들을 비호한 것이었고, 이후에도 고문이 계속될 수 있게 보장해주었다. 고문 사실이 명백했기에 법원과 검찰의 기본 양심을 믿으려 했던 ‘순진한’ 김근태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그는 재판이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당신들이 아무리 똑똑해도 우리를 이길 수 없다고 큰소리치던 고문경찰들의 말을 새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고문이 죄가 아니라 빨갱이인 것이 죄이고, 정권과 언론이 한번 빨갱이라고 지목하면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죄인이 되는 현실을 처절하게 체험했다.

아무런 검증이나 항변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정권, 검찰이나 경찰, 언론이 특정 인사나 집단을 빨갱이로 지목하기만 하면 빠져나올 여지가 없어진다는 걸 잘 아는 우리 사회의 부패·비리 집단은 그것을 100% 활용했다. 과거 문민정부의 사정 대상 1호로 지목됐고 학교공금 횡령과 부정 편입학 혐의로 법정에 선 상지대의 김문기 이사장은, 1986년 7월 교수 채용 과정에서 금품을 수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것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면서 농성하는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았다. 그는 자신을 추종하는 학생들과 직원들에게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고 적힌 유인물을 제작해 학생들의 농성장 주변에 몰래 뿌리고 신고한 다음, 경찰병력을 요청해 학생들을 연행해가도록 했다.

오빠가 좌익으로 몰려 죽게 된 상황에서 박완서는 “어머니에게는 아들이 살았느냐 죽었느냐가 문제지 빨갱이냐 흰둥이냐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진실과 사랑의 눈으로 보면 ‘상 하나님’은 바로 사람 잡는 괴물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과 가족을 짓밟고 모든 것을 빼앗아간 무서운 하나님은 우상에 불과하고 실체가 없는 허깨비임을 알아챌 수 있다. 현재와 과거에 지은 죄가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더 ‘상 하나님’의 힘에 기댄다는 사실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괴물이 사람 잡는 이야기’

그런데 아직도 일부 정치가나 언론은 입만 열면 이 ‘상 하나님’에게 매달린다. 2011년 7월20일치 <조선일보>는 ‘해군기지 부지가 좌파단체 해방구로’라는 헤드라인을 달았고, 또 다른 날에는 “제주가 좌파 종북세력의 투쟁 최일선이 돼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옛날에는 이렇게 소리 지르면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을 죽여도 좋고, 고문해도 좋다”고 했지만, 지금은 머뭇거리며 그냥 경찰력만 출동시켜서 잡아가라고 한다. 그게 불안하니까 그들은 더욱더 “하나님, 저들은 좌파입니다. 종북입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우리 후세대는 ‘괴물이 사람 잡는 이야기’를 희극 장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